일상첨화

오지호 작가 소개

1905–1982 / 전라남도 화순 출생

오지호는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의 선구자로 불리는 서양화 1세대 작가이다. 화순의 자연에서 뛰놀며 남도의 따뜻한 풍경 속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일제 강점기에 도쿄미술학교(현 도쿄예술대학東京藝術大学)를 다니며 서양화를 배웠고, 학우들과 함께 조선인 최초 순수 미술 단체인 ‘녹향회’ 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 후반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후 고향에 내려와 광주에서 조선대학교 교수(1949–1960)로 재직하며, 1948년에는 광주의 서양화가들과 ‘광주 미술 연구회’를 결성하는 등 호남 서양화단의 기반 조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6·25 전쟁 이후 1953년부터 광주 지산동에서 30년 동안 거주하였다. 오지호는 화업뿐만 아니라 국한문 혼용 운동과 같은 사회 활동을 하고 일제에 저항한 민족주의자로서 지사적 삶을 살았다.

오지호의 작품은 맑은 색채로 표현된 한국의 자연이 그 특징이다. 작가는 자연을 미의 근본이라 여기며 조선의 청량한 자연을 맑고 밝은 색채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에 적절한 화풍으로서 인상주의 화법을 구사하며 이와 관련하여 자신의 뚜렷한 회화론을 여러 저서와 글을 통해 남긴다. 특히 빛에 의해 반사되어 드러나는 자연의 생명력을 중요시하였다. “회화는 태양과 생명과의 관계요, 태양과 생명과의 융합이다. (…) 회화는 환희의 예술이다. 환희는 회화의 본질이다. 회화는 환희만으로 되는 예술이다.”라고 말하며, 태양 빛에 의해 포착되는 찬란한 환희의 생명력을 강조하였다. 당시 서양 화법이 받아들여져 인상주의 화풍이 주를 이뤘지만, 오지호가 다른 작가들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한국의 자연을 담으며 인상주의 화풍을 가장 한국적으로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는 순수한 자연의 색채로 표현된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후 1950년대에 추상 미술이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을 때에도 오지호는 지속적으로 자연을 그리며 구상주의 회화론을 이어 갔고 한국의 자연이 지닌 생명감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오지호는 한국 미술계에서 한국적 인상주의로 대표되는 예술가인 동시에 호남 미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거목으로 남아 있다.

김환기 〈무제〉

연도 미상.

임직순 〈노을〉

연도 미상.

임직순 시각적 해설

〈가을과 여인〉, 1974.

파테 무다레스 시각적 해설

〈최후의 만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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