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바바뇨냐 : 해항도시 속 혼합문화
말라카, 세상을 잇는 바다의 길목
말레이시아 서남부에 위치한 말라카는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최단 항로에 위치한다. 이곳에 부는 바람은 계절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데, 이러한 계절풍이 무역풍으로 바뀌며 사람과 물자 그리고 문화가 실려 왔다.
한때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던 말라카는 15세기 초 정화의 대원정 시기 이후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통해 세계적인 해상 왕국으로 성장하였다. 중개무역을 위한 중국인의 이주가 늘어나면서, 현지 여성들과의 혼인을 통해 페라나칸이라는 집단이 형성되었다. 남성(바바)과 여성(뇨냐) 그리고 그들의 후손은 본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보였고, 정화를 기리는 청운정(青雲亭) 등에 중국의 전통적 문화요소를 남겼다.
말라카의 왕은 세계 교역을 이끌던 무슬림 공동체를 유인하고자 이슬람으로 개종하였고, 이로써 유럽와 아시아를 잇는 국제 교역망의 중심에 말라카 왕국이 자리하게 된다. 이 지역의 이슬람은 토착신앙과 불교·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무슬림 고유 색채보다는 상대적으로 유연한 모습을 보이는데, 말레이 전통 건축과 아랍 양식이 섞인 술탄왕국박물관, 이슬람과 힌두교의 양식이 융합된 캄풍 훌루 모스크 등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말라카의 번영은 많은 유럽 상인들의 왕래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포르투갈로 산티아고 요새와 성 바울 교회를 세웠고, 네덜란드는 강의 퇴적토로 만든 붉은 벽돌로 그리스도 교회와 광장을 세워 말라카 속 유럽과 같은 독특한 도시경관을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이어서 영국도 광장 중심에 빅토리아 여왕의 인장을 생긴 분수대를 세우고 개신교회를 성공회 교회로, 총독 공관을 학교로 탈바꿈시키는 등 그들의 문화를 덧입혔다.
말라카에 유입된 아시아와 유럽의 다채로운 문화요소는 현지인들의 일상에 수용되었다. 오늘도 불교 사원에서 향을 태우는 사람과 하루 세 번 메카를 향해 예배하는 무슬림이 인사를 나누고, 광장의 교회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성공회 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저마다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거나 변형됨 없이 다양성 그대로 존중받는 혼합문화의 공간인 말라카는 2007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