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유지원 시각적해설
〈판타스마고리아〉, 2023.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작지원
종이 상자를 잘못 뜯은 적이 있나요? 골판지가 삐죽 튀어나오면서 안에 있던 내용물이 쏟아져 버립니다. 상자 역시 찌그러져 버립니다. 갑작스러운 사고에 머리를 한 대 세게 얻어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게 됩니다. 엉망이 된 자리를 보면 막막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찌그러지고 부서진 상자 형태의 오브제들을 벽에 붙인 모양입니다. 잘못 뜯은 상자처럼 겉은 조각나고 부서졌습니다. 그 단면을 만져보면 우툴투둘하고 거칠거칠합니다. 반면 안은 노랑, 파랑 등 형형색색으로 칠해져 있습니다.
작가는 골판지, 타일, 시멘트, 페인트 등 건설 현장에서 쓰이는 재료로 폐허와 같은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오브제들을 이어서 붙인 벽면을 바라보면 부서진 건물의 잔해들이 널려 있는 듯 합니다.
작가는 왜 이런 참담한 상황을 표현했을까요? 작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우리가 대량 생산품처럼 소비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끊임없이 지어지고 부서지는 집의 한시적인 운명을 표현하며 소비 풍조가 만연한 자본주의의 이면을 비판한 것입니다. 시장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대미술의 본질을 돌아보자는 의도도 담겨 있습니다.
‘환상’, ‘주마등’을 뜻하는 ‘판타스마고리아’가 이 작품의 제목입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 사회가 판타스마고리아처럼 유령 같고 신화적인 사회라고 칭했습니다. 작가가 선보이는 틈 사이로 신화 뒤에 가려졌던 기억의 파편을 찾아보세요.